▲ 아로요 대통령

한국에서 정보기관의 도청과 거기에 담긴 내용이 사회적 문제가 된 가운데, 필리핀과 이탈리아에서 발생한 도청·감청사건도 큰 정치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을 정치적 수렁으로 몰아 넣은 것은 한 개의 도청 테이프였다. 그 테이프에는 아로요가 작년 5월 필리핀 대선결과 조작을 선관위에 지시한 것으로 볼 만한 정황이 담겨 있었다.

지난 6월 초 필리핀 야당이 공개한 테이프에서, 아로요 대통령은 개표 집계 도중 선관위 간부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나와 야당 후보와의 표차이가 100만표 이하로 떨어질 수 있느냐”고 물었고 그 간부는 “표차는 이미 100만표가 안되지만 집계 중이며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실제 아로요는 100만표를 조금 넘는 표차로 영화배우 출신의 페르난도 포 후보를 이겼다.

아로요 대통령은 테이프 공개 초기에만 해도 “조작”이라며 통화 자체를 부인했지만, 필리핀 정보기관(NBI)의 전(前) 부국장이 테이프의 여성이 아로요라고 지목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아로요는 결국 6월 27일 기자회견을 갖고 전화를 건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선관위원에게 자신의 표를 지켜 달라는 취지였다며 퇴진 요구를 거부했다. 최근 필리핀 야당의원들이 탄핵안을 하원에 제출하고 아로요는 내각제 개헌카드로 맞서는 등 필리핀 정국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수사 당국의 감청 자료가 언론에 유출돼 안토니오 파지오 중앙은행 총재가 궁지에 몰렸다. 그 자료에는 이탈리아의 안톤베네타 은행 매각과 관련, 파지오 총재가 인수에 뛰어든 네덜란드계 은행 대신 이탈리아인민은행(BPI)을 지원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담겼다.

지난 7월 11일 자정이 지날 무렵, 파지오는 BPI의 지안피에로 피오라니 행장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사인했네”라고 말했고, 피오라니는 “고맙네…당장 자네 이마에 키스라도 하고 싶네”라고 답했다는 것. 두 사람은 친구로 알려져 있다.

이 감청은 문제의 은행인수 건을 둘러싸고 소송이 제기되자 이탈리아 당국이 이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이탈리아 정부가 파지오 총재의 경질 요구를 거부하자, 유럽연합은 이탈리아 은행개방 부문의 조사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파장은 커지고 있다.